# 이미 있던 이름들

> [!NOTE]
> **한 장 요약.** 늘 돌아가는 버전을 조금씩 고치는 **브리콜라주**(1990), 프로그램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인 **최종사용자 프로그래밍**(2011), 결과보다 탐색의 즐거움이 앞서는 **캐주얼 크리에이터**(2015). 바이브 코딩은 이 셋에 새 도구가 붙은 것이고, 셋 다 "그건 정당한 방식"이라고 말해 줍니다 — 그리고 셋 다 같은 함정(블랙박스, 과신, 오트밀 천 그릇)을 미리 적어 두었습니다.

바이브 코딩을 처음 접한 예술가가 "이건 코딩이 아니지 않나?"라고 느낀다면, 그 느낌에는 30년 된 이름이 있습니다. 세 편의 고전을 읽으면 바이브 코딩은 새 태도가 아니라 **오래된 태도에 새 도구가 붙은 것**으로 보여요.

## 브리콜라주 — Turkle & Papert, 1990 [37]

셰리 터클과 시모어 페퍼트는 Logo와 Lego로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아이들과 대학생을 관찰하고, 두 가지 스타일을 구분했습니다. **플래너**는 문제를 쪼개 모듈로 설계한 뒤 짓고, **브리콜뢰르**는 "붓질 사이에 물러서서 보는 화가처럼" 재료를 만지며 협상하고 재배치합니다.

> "플래너에게 실수는 헛디딤이고, 브리콜뢰르는 중간 궤도 수정으로 항해한다. 플래너에게 프로그램은 미리 계획한 통제의 도구이고, 브리콜뢰르는 목표가 있지만 **기계와의 협업이라는 정신으로** 그것을 실현한다. 플래너에게 프로그램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'할 말을 하는 것'이고, 브리콜뢰르에게는 독백보다 **대화**에 가깝다."

아홉 살 앤의 방법은 그대로 바이브 코딩 루프입니다: "단순한 작동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조금씩 고쳐 간다. 검은 새 한 마리로 시작한다. 날게 한다. 색을 준다. … 매 단계에서 그는 부분이 아니라 **완성품의 한 버전**을 갖고 있다." 저자들은 "앤은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지만 **화가처럼 생각하고 있다**"고 씁니다. 그리고 못 박아요: 브리콜라주는 "더 나은 형태로 가는 단계가 아니라 **일을 조직하는 한 방식**"이라고. 결과의 질이 아니라 과정이 다를 뿐이라고.

1990년에 은유였던 "대화"가 2025년에 문자 그대로가 됐습니다. 한 가지 긴장은 남아요. 이 논문의 브리콜뢰르들은 **남이 만든 블랙박스를 싫어했습니다**("전부 뜯어보고 싶었다"). 생성된 코드는 역사상 가장 큰 블랙박스죠. 다만 같은 논문이 탈출구도 줍니다 — 브리콜뢰르는 남의 프로그램은 "사람을 알아 가듯 **행동을 통해** 알아 가는" 데 만족한다고. 실제로 시각화 연구의 참가자들이 생성 코드를 다룬 방식이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[29].

## 최종사용자 프로그래밍 — Ko 외, 2011 [39]

ACM Computing Surveys의 44쪽짜리 리뷰는 "프로그램이 **목적이 아니라 수단**인" 사람들을 다룹니다. 2012년 미국에 전문 프로그래머는 300만 명 미만이지만 스프레드시트·데이터베이스를 쓰는 사람은 5500만 명이라는 통계로 시작하고, 첫 번째 표에 **"예술가: Processing 같은 언어로 인터랙티브 아트를 만든다"** 를 올려 둡니다.

이 리뷰가 20년 전에 관찰한 것이 바이브 코딩 연구에서 그대로 재발견됩니다.

- **요구사항은 만들면서 드러난다**: "취미가들의 땜질(tinkering)은 정해진 끝 없이 기술을 재구성한다"; "요구사항은 실험을 통해,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면서 진화한다." → 바이브 코딩의 "점진적 요구 명확화" [7], "출력을 보기 전에는 생각도 못 한 것들이 많다" [13].
- **과신**: 스프레드시트 사용자의 값 판단 중 5~23%가 틀렸고, "틀린 값을 맞다고 하는 쪽이 맞는 값을 틀리다고 하는 쪽보다 훨씬 많았다." 즉각적 출력은 정확성 피드백 없이 과신만 키운다. → 이제 **AI도 "다 했다"고 주장하는 두 번째 과신 주체**가 됐습니다 [11][29].
- **기회주의적 디버깅**: "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코드를 고친다"는 방식은 "추가 오류로 이어진다." → 에이전트의 "기능 고치기 부작용" [30], 초보의 "주사위 굴리기" [13].
- **관심 투자**: 사람은 이익·비용·위험을 저울질해 노력을 배분한다. 꼼꼼한 사전 분석이 "반복 조정보다 관심을 잘못 쓰는 것"일 수 있다. → 위키가 "테스트 단계"를 따로 두지 않고 **만드는 루프 안에 확인 습관을 심는** 이유.

또 하나 중요한 관찰: "자기를 위한 웹페이지에서 **남을 위한 웹페이지로** 넘어가는 순간 활동의 성격이 바뀐다." 검증 없이 짜 맞춘 코드가 갑자기 엄격한 관심을 요구하게 됩니다. 첫날 시제작과 12월 전시작의 차이가 이것입니다.

## 캐주얼 크리에이터 — Compton & Mateas, 2015 [38]

케이트 컴프턴은 Spore 생물 제작기, Picbreeder 같은 도구를 보고 **"빠르고, 자신 있고, 즐겁게 가능성 공간을 탐색해 놀라운 인공물을 만들거나 발견하게 하고, 자부심·소유감·창의감을 주는"** 시스템을 캐주얼 크리에이터라 불렀습니다. 핵심은 **자기목적성**(autotelic) — 과제 완수가 아니라 탐색의 즐거움이 목적이라는 것. "결과물은 완성 후 버려질 수도 있다!"

이 논문의 문장들은 Cursor 앞에 앉은 예술가의 심리를 그대로 묘사합니다.

- "캐주얼 사용자는 완전한 통제가 필요 없으므로 **통제의 상실을 속도·힘·놀라움과 기꺼이 교환한다**."
- 쇤의 성찰적 실천: "본다, 움직인다, 다시 본다 — 이 순환은 머릿속에서 탈신체적으로 일어날 수 없고 **인공물과의 대화 속에서 실연**되어야 한다."
- 디자인 패턴: **빈 캔버스 없음**(첫 수가 가장 어려우니 "제안을 받아들이거나 버리거나"로 줄인다), **돌연변이 쇼핑**(편집 대신 근처 대안들을 둘러본다), **의미 있는 것을 조작**(z-스케일이 아니라 "bloom"을 만지게 한다), **합창단**(변형을 한꺼번에 보여 준다).

그리고 경고 하나 — **"오트밀 천 그릇"**: 컴퓨터에게는 서로 다르지만 사람에게는 똑같아 보이는 인공물들. 2015년의 이 이름이 2026년에 "디자인 동질화"로 재등장합니다 [28]. 처방도 같아요: 첫 번째 그럴듯한 결과를 받아들이지 말고 **여러 변형을 나란히** 보라.

이 논문의 기준으로 보면 LLM 코드 생성은 꽤 나쁜 캐주얼 크리에이터입니다 — 가능성 공간이 "고장 난 인공물을 배제할 만큼 좁지" 않고, 피드백이 즉각적이지 않고(30초 대기), 기본 출력이 오트밀이니까요. 그래서 예술가가 **도구 주위에 무엇을 덧붙여야 하는지**(제약, 빠른 미리보기, 나란한 변형)를 알려 주는 체크리스트로도 읽힙니다.

## 수업에서

> [!TIP]
> - 자기소개 119초 때 "나는 플래너인가 브리콜뢰르인가"를 한 단어로 붙여 보세요. 이 코호트는 대부분 브리콜뢰르일 겁니다. 그러면 오늘 하루의 방식(항상 돌아가는 버전을 고쳐 간다)이 낯설지 않아집니다.
> - "오트밀 천 그릇"은 마무리 20분의 감상 기준으로 씁니다: 서로의 페이지가 **컴퓨터에게만 다른지, 사람에게도 다른지**.

## 2025년의 두 이름

**co-drifting** — 크링스 등은 실무자 10명을 인터뷰하고 Copilot식 "co-piloting"(사람이 이끌고 AI가 돕는다, 효율·정확·재사용)과 Cursor·v0·bolt식 **"co-drifting"**(사람과 AI가 함께 표류한다, 탐색·창발·놀라움, "코드는 창작의 잔여물")을 나눕니다. 한 참가자: "스크립트를 저장하는 게 아니라 흐름을 저장한다." 이들은 바이브 코딩을 "전문가와 비개발자 모두를 위한 **표현적 최종사용자 개발**"이라 부르고, 프로그래밍을 "표현적이고 사변적인 실천"으로 다시 생각하자고 제안합니다 [9].

**인터페이스 평탄화** — 진(Jin)은 미디어 이론으로 읽습니다. GUI·CLI·API가 하나의 프롬프트 상자로 납작해지지만, 그 아래에는 원격 GPU·프로토콜·모델 제공자라는 더 두꺼운 층이 생기고 **통제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쪽으로 이동**한다고. "프로그래밍 언어의 상징적 역량이 사유화되고, 예전엔 커뮤니티와 교육기관에 분산돼 있던 전문성이 독점 시스템에 집중된다" [10]. Processing과 Arduino IDE를 이 계보 안에 두는 것도 이 논문입니다. 12월 이후에도 작품이 돌아가려면 어느 층에 의존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됩니다.
